히로시마시(廣島市)는 일본 히로시마현 서부 아키 지역에 위치한 현청 소재지로, 주고쿠·시코쿠 지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이자 정령지정도시입니다. 도쿄 23구를 제외하면 일본 전체에서 인구 10위에 해당합니다. 히로시마는 지점 경제 도시이자 지역 중추 도시로, 주고쿠 지방 대기업의 지사와 다수의 국가기관 지방 사무소가 모여 있습니다.
시는 나카구, 히가시구, 미나미구, 니시구, 아사미나미구, 아사키타구, 아키구, 사에키구 등 8개 행정구로 구성됩니다. 히로시마는 세계 최초로 핵무기(원자폭탄) 공격을 받은 도시로 잘 알려져 있으며, “국제 평화 문화 도시”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시장이 주도한 평화수장회의에는 현재 150여 개국, 7,400개 이상의 지방자치단체가 가입해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일본을 대표하는 군사 도시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고대~중세에는 현재 히로시마 시가지가 있는 오타가와 삼각주가 형성되지 않았으며, 당시 아키국의 중심은 현재의 아키군 후추정이나 히가시히로시마시 사이조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16세기 말, 무장 모리 데루모토가 오타가와 삼각주를 개척하고 히로시마 성을 건설하여 지역 중심 기능이 이곳으로 이동하였고, 히로시마의 도시 발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에도 시대에는 히로시마 번 42만석의 조카마치로 번영했습니다.
메이지 시대 이후 히로시마는 육·해군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으며, 청일전쟁 시기에는 히로시마 대본영이 설치되었습니다. 메이지 천황이 이곳에 머물렀고, 제7회 제국의회가 이곳에서 개최되어 잠시 일본의 임시 수도 역할을 했습니다.
1945년 8월 6일, 미군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Enola Gay)가 히로시마 시 중심부의 아이오이바시 상공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를 투하하여 시가를 순식간에 파괴했고, 수만 명이 즉사했습니다. 같은 해 말까지 사망자는 약 13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생존자들은 평생 화상 흉터, 방사선 후유증, 정신적 외상, 유전적 위험에 시달렸습니다.
전후 히로시마는 중공업과 자동차 산업(대표적으로 아키군 후추정에 본사를 둔 마쓰다)을 기반으로 재건되어 세토내해 공업지대의 중요한 공업 도시로 성장했습니다.
1970년대 이후 히로시마는 인근 아사군과 다카타군의 마을을 편입했고, 1980년 4월 1일 일본 10번째 정령지정도시가 되었습니다. 1985년 3월에는 인구가 100만 명을 돌파했으며, 현재까지 주고쿠·시코쿠 지역에서 유일한 100만 도시입니다. 히로시마 도시권은 지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권이며, 삿포로·센다이·후쿠오카와 함께 “삿센히로후쿠”로 불리는 일본의 지역 중추 도시 중 하나입니다.
히로시마 시내 교통은 히로시마 전철이 중심으로, 규모와 승객 수 모두 일본 최대의 노면전차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버스와 함께 대중교통 기능을 담당하며, 지하철은 없지만(과거 건설 계획은 있었음) 히로시마는 “3B” 특징으로 유명합니다: Bus(버스 노선이 많음), Branch(대기업 지점이 많음), Bridge(삼각주 지형으로 인해 다리가 많음).
히로시마는 동쪽으로 히가시히로시마시, 북쪽으로 기타히로시마정과 접합니다. 참고로, 홋카이도에도 기타히로시마시라는 자치체가 있는데, 이는 메이지 시대에 히로시마현 사람들이 홋카이도 삿포로군으로 이주해 만든 “히로시마촌”에서 유래했으며, 이후 히로시마정으로 바뀌었다가 현재의 기타히로시마시가 되었습니다.